우프생각 15
2006년 9월 25일
살다가 보면
잊혀진듯했던 기억이
갑자기 의식의 한가운데로 솟아올라
옛날 생각에 빠지게 한다.
20대 초반 혈기방장했던 때,
교회선배와 같이 명동으로갔다.
그 당시 종로보다 더 물 좋던 명동...
지금의 강남역이라고나 할까 ...
(강남역도 한물갔나 ???)
나나 그 선배나 둘 다 여친이 없어서
둘은 비장한 각오로 나간 것이다.
"오늘은 무조건 맘에 드는 사람이 있으면
따라가서 말을 붙이고 꼭 애프터를 하자고.."
나나 그 선배나 여자 앞에서는
말을 더듬거리는 참 순진한 총각들이었다.
명동 버스 정류장에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서
맘에 드는 아가씨를 발견하였다.
버스를 타는 아가씨를 따라
우리 둘은 무작정 올라탔다.
버스 안에서 일단 자주 쳐다보면서 복선을 깔았다.
그 아가씨 역시 우리가 자주 쳐다보니까
자기를 따라 오는 것이라고 짐작을 한듯하다.
그 당시만 해도 소개팅이 거의 없이
이렇게 무작정 따라가서 말 붙이기가
가장 중요한 이상친구 사귀는 방법이었다.
당시 유명가수 송창식의 노래에도
" (남자가 애타서) 왜 이렇게 앞만 보며 남의 애를 태우나
(여자가 속타서) 언제쯤 말을 걸려나 집에는 다와가는데 "
라는 가사가 있을 정도로 아가씨 꽁무니를 따라다니는 것은
용기있는 남자의 모습으로 여겨지던 때였다.
버스에서 내렸다.
내가 살던 신림동과는 정반대인 수유리였다.
그 아가씨는 앞만 보고 걸어가고..
우리는 뒤를 따라 가다가
수십번의 심호흡끝에
내가 말을 붙였다.
" 저 시간있으면 커피 한잔만 해도 될까요?"
당근 시간이 없다고 하고
뭐하는 놈팽이냐는 식으로
우리를 쳐다 보았다.
우리는 얼굴이 빨개져서 어쩔줄 몰라하면서
큰 길에서 떠듬떠듬 우리에 대해 약간 소개를 하고
"내일 명동 성모병원 분수대에서
저녁 6시에 기다리겠습니다." 라고
일방적인 약속을 하였다
그리곤 후다닥 버스 정류장으로 가서
명동으로 도로 나가는 버스를 잡아탔다.
그 다음 날 저녁 6 시 명동 성모병원앞 분수대에서
그 아가씨를 만날 수 있었다.
분수대 옆에서 30 여분간 이야기를 한 것같다.
서로 통성명을 하고..
명동 가까이 있는 그 유서깊은
영락교회를 다닌다고 했다.
그리고 성가대 연습을 가야한다고 했다.
난 그 아가씨에게
집 전화번호를 좀 알려달라고 했다.
당시 핸드폰은 이 지구상에서 존재하지 않았다.
당근 삐삐(호출기)도 없었고....
(혹시 삐삐 모르는 학생은 아빠에게 삐삐를 물어 보도록..)
그 아가씨는
자기 집은 매우 엄하여
남자에게 전화오면 엄청 혼난다면서
나의 전화번호를 물어 보았다.
우리집엔 그 때 전화가 없었다.
그 당시 10 가구중 8 가구 정도는 전화가 있었는데..
우리집은 형편이 어려워 전화가 없었다.
전화가 없다고 하기는 쪽팔려서
( 그 당시 나는 가난한 것이 챙피했다)
내일 저녁에 다시 여기서 만나자고 했다.
다음날 모아둔 용돈을 가지고 나갔다.
근사한 레스토랑에 가서 비프스테이크나 돈까스를
먹으면서 서로에 대해 좀 더 잘 알리라..
그리고 그 아가씨의 직장 전화번호를
꼭 알아내리라고 맘을 먹었다.
그런데 바람을 맞았다.
거의 3 시간을 더 기다렸는데..
그 아가씨는 영영 나타나지 않았다.
지금 다시 생각해 보니
그 당시 나는 그 아가씨가
상당히 맘에 들었던 모양이었다.
바람 맞은 이후로
수유리 버스 정류장에
퇴근시간에 맞추어 3-4 번 갔으며
영락교회 성가대가 연습하는 곳도 찾아가 보았다..
그러나 그 아가씨를 영영 만나지 못했다.
지금도 그 아가씨가
나오지 않은 이유는
나의 전화번호를 가르쳐 주지 않았던 것으로 생각된다.
짧은 시간이나마 서로에 대한 소개를 하면서
상당히 화기애애한 분위기였다.
그러다가 내가 전화번호를 가르쳐주지 않자
그 아가씨의 얼굴이 굳어지면서
급히 가버린 것으로 기억난다.
집에 전화가 없으니 가르쳐 줄 수가 없는 것을
그 아가씨는 아직까지 모를 것이다.
세월이 많이 흘러
이제는 40 대 중반의 아줌마가 되어있을
해맑고 상큼했던 그 아가씨가
오늘 갑자기 내 의식의 한가운데를 차지하고
나를 미소짓게 만든다.
누구나
산다는 것이
그렇게 별 것도 아닌데
지나간 모든 일들은
세월 속에서 보석이 된다..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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